대한민국 "인권 연구가"의 현주소 잡설


한국의 1948년생 남성 엘리트는 시대를 앞서가는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동시대의 선각자들이야 그 말고도 많겠지만, 그 주제가 소수자/인권에 관련된 문제들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젠더 문제에 관심도 없었던 언론사, 정치인들이 얼토당토 않은 비난에 가세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비난은 더 나아가기 위한 극복의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앞으로 '안경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비난할리 만무하니까요. 한국의 젠더 인식 수준을 '안경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에도 아무런 관심도 없을테니까요. 그래서 너무너무 화가 납니다.


대한민국의 이름 난 "인권 연구가"이자 한국여성민우회 법률 자문위원이신 홍성수 교수님의 목표는 대한민국 인권 수준을 '안경환 수준'으로 올리는 것이다. 대체 '안경환 수준'이라는 게 뭘까. 아마도, 원하는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혼인증명서 위조 정도는 해도, 그 이상의 몹쓸 짓은 하지 않는, 뭐 그런 사회가 아닌가 싶다. 아마 그보다 좀더 진일보하면, 강제 결혼보다는 약한, 돼지발정제 사용까지만 허용되는 그런 사회겠지.

이런 분들이 이끌고 있는 대한민국의 인권/소수자 운동의 미래는 너무나 밝다. 더욱더 노력해서, 몇 년 안에 인도 정도는 따라 잡도록 합시다, 홍 교수님!

내가 아는 그 사람은 그 사람이 맞는가? 잡설


안경환 교수가 법무부장관으로서 "폭력 사내"의 입장을 배려하는 정책을 펼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 정반대일 것이다. 모든 성폭력에 확고히 반대하는 정책을 펼칠 것이고, 인권주무기관으로서의 법무부의 위상을 확고히 할 것이다. 이건 그의 살아온 인생이 증명하고, 그의 지인들이 보장할 것이다. 나도 그점에 대해서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사석에서 몇 번 말씀 나눈 적도 있고, 특히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시 '모양새를 내려 모셔온' 정년퇴임 교수가 끝까지 시민들과 함께 싸우는 모습에 크게 감동한 바 있다. 걸어온 인생만큼 강한 입증은 없다고 생각한다.


링크한 홍성수 교수의 글은 논란이 된 안경환 법무부장관 지명자의 <남자란 무엇인가>에 대한 일종의 변호이다. 책에 대한 변호 자체는 크게 문제 삼을 게 없다. 홍 교수는 안 지명자의 책은 비록 친절하지는 않지만, 맥락상 남성의 성적 본성이나 성매매를 정당화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안 씨의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홍 교수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 더욱이, 글 말미에 홍 교수는 안 씨의 성 인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도 적절히 지적한다. 안 씨가 "생물학적 남성의 '본질'을 일종의 고정변수"로 보고 있고, 이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나와야 할 지적이지만, 나는 홍 교수 외에 이런 지적을 하는 이를 보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홍 교수의 글은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홍 교수의 글에서 정작 내 눈길을 끈 것은 위에 인용된 문단이다. 글의 중간쯤에 배치된 이 문단에서, 홍 교수는 안 교수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성폭력과 인권 문제에서 진일보를 이루게 할 적임자임을 강조한다. 안 지명자와 그의 삶을 지켜본 그의 지인들과 홍 교수 자신이 이를 보증한다는 것이다. 그는 안 씨가 "걸어온 인생"이 그것을 입증해준다고 거듭 확신한다. 내가 거슬리는 건 바로 홍 교수의 이 '확신'이다.

홍 교수의 확신은 그 자신이 안 지명자가 걸어온 인생을 잘 알고 있다는 판단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타인을 '안다'는 확신은 인간이 가장 쉽게 빠지는 함정 중 하나이다. 인간은 자신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은 타인에게 신뢰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관계를 맺는 순간 그는 '모르는 사람'에서 '어느 정도 아는 사람'로 재분류된다. 관계를 맺는 빈도가 높아지고, 그에 대한 제3자의 평가까지 접하게 되면 '어느 정도 안다'는 느낌은 쉽게 '확신'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이런 착각이야 말로 인간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함정이다. 자기 속도 모르는 게 인간인데, 타인은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은 바로 인간이 가진 이런 약점에 대한 일종의 경고다.

이런 경고를 무시하는 것은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다. 다소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대부분의 사이코패스들은 주변으로부터의 좋은 평판을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출 무기로 삼는다. 이를 위해 그들은 이웃들에게 늘 친절을 베푼다. 그 모습을 본 이웃들은 그가 좋은 사람임을 확신하고, 그에 대한 좋은 평판을 형성하는 데 일조한다. 즉,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이코패스의 보호막이자 그가 노리는 희생자를 잡을 덫으로 이용당하고 있는 셈이다. 

유사한 문제가 사회 곳곳에서 흔히 발견된다. 나 역시 지우고 싶은 경험이 있다. 군복무 시절 친하게 지냈던 후임이 있었다. 같은 중대에 속했으나 소속이 달라 내부반 생활을 같이 하지는 않았지만, 대화도 잘 통하고 인성도 좋아서 나는 그를 무척이나 아꼈다. 당시는 군대에 가혹행위가 존재할 때라 우리라도 내무반 문화를 좀 바꿔보자는 얘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내가 그의 실체를 알게 된 것은 제대를 불과 1주일 정도 남겨둔 시점이었다. 나는 그가 그의 후임들에게 얼마나 악질적인 고참인지를 나와 그리 친하지는 않았던 다른 후임으로부터 전해들었다. 일부러 기회를 노려 그의 가혹행위 장면을 직접 목격하기 전까지,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했다. 제대 전날이었던가, 나는 그 말을 내게 전한 그 후임에게 그 사실을 왜 이제야 말했냐고 물었다. 그는 나와 그가 너무 친해서 자기 말을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그의 실체를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웠고, 그래서 제대하기 전에 알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선임, 동기, 후임들에게 그에 대한 칭찬을 하고 다녔었는지를 깨닫고 나는 얼굴이 달아 올랐다. 나는 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가 나를 대하듯 남도 똑같이 대할 것이라고 믿었던가, 그런 회의가 밀려왔다. 내가 그를 칭찬할 때, 그에게 가혹행위를 당하던 후임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나의 무심하고 무지한 행동은 분명 그들의 고통을 가중시켰을 것이다. 그 후임에 대한 나의 믿음이 그가 가혹행위를 지속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 경솔함과 무지는 나 자신을 가해 옹호자로 만들었다. 그 때를 생각을 하면 지금도 얼굴이 달아 오른다.

안 지명자에게 절대적 신뢰를 보이는 홍 교수에게서 나는 군복무 시절의 나를 보았다. 그의 글로 미뤄보건대, 홍 교수는 안 지명자의 저서를 읽고, 그를 사석에서 몇 번 만났을 뿐 그와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안 지명자가 걸어온 인생을 이야기한다. 홍 교수는 안 씨가 1975년 그와 교제하던 여성의 도장을 위조해 허위로 혼인신고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불과 2년 전, 같은 학교 여학생을 기숙사로 불러들이고 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뜨려 퇴학당한 자신의 아들을 위해, 그가 탄원서를 작성해 퇴학을 아주 가벼운 징계로 바꾼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기에 아마도 몰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안 씨가 걸어온 인생이 입증하는 바 그가 성폭력과 인권 문제를 개선하는 데 적임자라고 확신했다. 홍 교수의 이런 발언은 안 씨에 의해 강제 혼인을 당했던 그 여성이나, 안 씨 아들에 의해 피해를 입었던 그 여학생의 피해 경험을 부정하는 것이다. 물론 홍 교수가 이런 상황을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안 씨를 '안다'고 여겼던 홍 교수의 경솔한 착각이 야기한 불가피한 결과다.

타인을 '안다'고 착각하고, 그에게 과도한 신뢰를 보이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가해자를 옹호하고, 피해자에게 2차 폭행을 가하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철저한 불가지론자가 되는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절대불변의 확실한 진리는 아니라는 분명한 자각, 자기가 알고 있는 영역과 모르는 영역을 명확히 구별하는 자세,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배치되는 정보를 접했을 때 그것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훈련을 통해서만 불가지론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친목질을 피하기 위한 훈련이기도 하다. 나는 회의하는 이성이 저열한 친목질을 압도하는 그런 사회를 꿈꾼다.





잡설 잡설

1.
지난달 M대학으로 출장을 갔을 때 벤치에 앉아 찍은 사진이다. 정오 무렵이었는데도 방학 중이라 캠퍼스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원래 사진을 찍히는 것도, 찍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날은 날이 너무 좋아서 그랬는지, 간만의 기차여행 덕에 죽었던 감수성이 살아나서 그랬는지 사진이 찍고 싶어졌다. 그러나 역시나 찍사 재능은 없어서 여러장 찍은 것들 중 그나마 봐줄만한 게 위 사진이다.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그날 해뜨기 전에 일어나 한국 정치에 관한 쓰잘데 없는 글을 끄적였던 기억, 노트북을 덮고 커피를 한잔 뽑아 들고, 숙소 밖을 나가 학교를 산책하며 해가 뜨는 걸 지켜봤던 기억, 하루 일정을 마치고 동료들과 펍에 앉아 지는 해를 보면서 시답지 않은 수다를 떨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게 사진과 이미지의 힘인가 싶다. 추억을 좀더 오래 기억하려면, 사진을 좀 찍어둘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찍사 포 더미 같은 책이라도 사야할까.


2.
지난주까지는 비가 자주 내리더니, 주말부터 날씨가 좋아졌다. 덩달아 기온도 올라가서 한 낮에는 30도에 육박할 때도 있다. 당분간 밖에 나가야 할 일이 없으니, 요새는 시원한 실내에서 화창한 바깥 구경을 하는 재미로 사는 것 같다. 날이 더우니 낮에는 산책을 할 엄두를 못내고, 이른 아침이나 해가 질 무렵에나 공원에 나가 산책을 한다. 마감이 촉박하게 다가오는 일만 아니면, 아주 평온한 삶을 누릴 수 있는 타이밍인데, 역시 신은 모든 걸 주시진 않나 보다.


3.
블로그를 닫으려던 마음을 돌린 후, 오히려 블로그에 더 자주 들어오고, 덕분에 글을 쓰는 빈도도 높아지는 것 같다. 블로그에 소소한 일상이나 감상을 남기려고 노력도 해보지만, 오랫동안 논문 같은 딱딱한 글쓰기만 해온 탓인지, 감상 같은 걸 남기는 데는 서투르다. 그쪽 방면의 어휘나 표현력이 많이 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뭐 원래 감수성이라는 게 없는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일상적인 얘기를 재치있게 잘 쓰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씩 부러울 때가 있다. 내게 그런 재능이 있었다면, 블로그하는 재미가 좀더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4.
<은교>와 <롤리타>에 관한 글을 쓰면서, 두 소설에 대한 일반인들의 감상평을 검색해 읽어봤는데, 암담한 글들이 몇 개 보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롤리타>의 내용이 처음에는 불편했으나, 마음을 열고 험버트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나니 롤리타에 대한 그의 사랑이 이해가 되었고, 그것이 너무 아름답고 슬프게 느껴졌다는 한 블로거의 감상 일기. <롤리타>를 읽으며 그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인간은 험버트와 같은 류의 사이코패스 나르시시스트 밖에 없을 것이란 나의 믿음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해 준 글이었다. 동시에 험버트에 매력을 느낀 여성들이 왜 그리 많은지도 대강 이해하게 됐다. 그들은 작가의 의도와 상관 없이 습관적으로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게 자연스럽게 되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롤리타>를 이런 방식으로 읽는 것은,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편의 심정을 이해해보려는 부인의 태도와 같은 것이다. 나보코프가 절대로 의도하지 않은, 소설을 정 반대로 읽는 방법. 저런 글을 보면, 하루종일 기분이 찝찝해진다.


5.
요새 창밖을 보며 자주 듣는 U137.


롤리타 vs. 은교 잡설

은교는 화형을 당해야 할 마녀인가

오래 전부터, 은교에 대한 논란을 대할 때마다 나는 은교라는 표상을 통해서 페미니스트들이 분을 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성을 대상화하지 말라고 외치는 목소리는 정당하다. 그러나 해당 예술작품의 주제의식, 은교라는 소설적 장치가 드러내는 바, 등에 대한 고려는 하지 않고 무조건 은교가 어린 여성이고, 이적요와 서지우가 나이 든 남성이라는 이유로 작품과 작가를 저급한 부류로 모는 것은 온당치 못한 처사에 불과하다.

소설 <은교>가 어린 은교에 대한 늙은 이적요의 성적 욕망을 그린 '저급한' 소설이 아님을 강변하는 이 글은, 수 십년 전 <롤리타>가 금서로 지정됐을 때 나왔을 법한 비판을 연상시킨다. 글쓴이는 '은교'가 이적요와 서지우의 갈망을 드러내는 일종의 소설적 장치일 뿐, 어린 여성에 대한 나이 든 남성의 성적 욕망이 소설의 주제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와 유사하게, <롤리타>를 옹호하는 이들 중에서도 험버트의 소아성애가 이 소설의 주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예컨대, 강신주가 그렇다. 그리고 이런 해석이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몇 해 전 온라인으로 수강했던 예일대 영문학 수업에서 수업을 진행한 교수가 수업에 참여한 여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롤리타>의 험버트가 데이트를 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한 번 손을 들어보세요." 손을 든 학생들이 생각보다 많았는지, 교수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은교>와 <롤리타>에 대한 위의 해석들이 두 소설의 '주제의식'과 '소설적 장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나온 잘못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두 소설 모두 어린 여성에 대한 성적 욕망과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주인공들(이적요와 험버트)의 나르시시즘을 주요 주제로 다루고 있다. 두 소설의 차이는 그것에 대한 작가의 시선과 태도에서 비롯된다. 박범신은 그것을 애써 감추고 포장하는 반면, 나보코프는 그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냉소한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것은 두 소설의 시점을 비교하는 것이다.

<롤리타>는 철저한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이는 험버트의 나르시시즘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그것이 제3자(독자)의 눈에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를 보여주기 위한 소설적 장치다.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험버트의 묘사에서 잘 드러난다. 소설 거의 첫 부분에서 험버트는 스스로를 이렇게 묘사한다. 

I was, and still am, despite mes malheurs, an exceptionally handsome male; slow-moving, tall, with soft dark hair and a gloomy but all the more seductive cast of demeanor.(p. 7)
"불운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특출난 미남이다. 느긋하게 행동하고, 키가 크며, 검고 부드러운 머리를 가지고 있다. 침울해보이지만, 그래서 나의 자태는 더욱 매혹적이다."

만약, 이 묘사가 전지적 작가 시점이나 다른 다른 소설 등장인물의 시점으로 묘사되었다면, 이는 험버트의 나르시시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독자에게 험버트가 매력남임을 설득하기 위한 소설적 장치가 된다. 간단히 말하면, 험버트에 대한 1인칭 묘사는 이 소설의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핵심적인 요소이고, 이를 인지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소설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 차이를 야기한다.

<롤리타>와 달리 <은교>에는 세 가지 시점이 공존하고 있다. 이적요의 시점, 그의 친구인 오영훈의 시점, 그리고 제자 서지우의 시점. 바로 이 다인칭 시점이 <은교>와 <롤리타>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결정적인 장치로 사용된다. 예컨대, <롤리타>와 마찬가지로 <은교>에도 이적요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그러나 그 묘사는 이적요 자신이 아닌 그의 지인인 소설 속 다른 인물에 의해 이뤄진다. 이적요의 변호사이자 친구인 오영훈의 묘사다.

깡마른 편이지만, 이적요 시인은 키가 180센티미터가 넘는데다가 단단히 벌어진 어깨를 비롯, 기골이 장대한 사람이었다. 힘도 좋아서 감옥에 있을 때에도 힘으로 이적요 시인을 당할 자가 없었을 정도였다.

나보코프가 험버트에 대한 묘사를 1인칭으로 서술한 것은 그 묘사가 객관적 시선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한 장치다. 이와 반대로, 박범신이 이적요를 1인칭이 아닌 타인의 시점으로 묘사한 것에는 그 묘사에 객관성을 부여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실제로 오영훈의 이 묘사는 이후에 등장하는 이적요 본인의 1인칭 묘사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 * *

블로그에서 벌써 두어 번 다뤘던 <은교> 얘기를 또 꺼낸 이유는, <은교>의 주제의식과 소설적 장치에 대한 고려 없이 이 "예술작품"과 작가를 저급한 부류로 모는 것이 온당치 못하다는 글쓴이의 주장이 거슬렸기 때문이다. 소설 <은교>를 옹호하는 저 글에서 글쓴이는 정작 소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시도하지 않는다. 대신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은교가 아니라 이적요와 서지우이고, 은교는 그 둘의 갈망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는 일종의 상징물이라고 주장한다. 

"이적요와 서지우는 서로 다른 바를 갈망한다. 전자가 갈망하는 바는 시에 골몰하느라 떠내려보낸, 노화라는 제약이 존재하지 않는 삶이다. 후자가 갈망하는 바는 시에 골몰하기엔 부족해서, 이적요에게 허락된 바를 누릴 수 있는 삶이다." (모호한 뒷 문장은 "시에 골몰하기엔 부족한 후자가 갈망하는 것은 이적요와 같은 삶이다"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영화 <은교>에 대한 심영섭의 글이 거의 유사한 해석을 좀더 명확하게 제시한다.

"이적요에게 가질 수 없는 것이 은교라면, 서지우에게 가질 수 없는 것은 적요의 문학적 재능이다. 현실과 불화하고 감시와 오해의 눈초리 속에서도 나만의 은교를 나만의 이야기를 찾아 헤매는 이적요와 서지우의 모습은 모든 인간의 본연의 모습은 아닐는지."

그러나 글쓴이(와 심영섭)가 간과하고 있는 건 서지우에 대한 소설 속 묘사가 거의 대부분 이적요의 시선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이적요는 본인이 나이가 많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서지우보다 우월하다는 자신감을 숨기지 않는다. 70대 후반의 그는 문학적 재능뿐 아니라 신체적 능력에서도 30대인 서지우를 능가한다고 믿는다. 주목할 점은 박범신이 이적요의 이 믿음을 입증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서지우의 일기'라는 점이다. 심지어 서지우의 일기에 기록된 은교의 대사조차도 이적요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예컨대 이런 것.

한은교: "[할아부지는] 키도 선생님보다 훨 크구요. 휘날리는 흰머리, 멋있구요. 눈웃음도 되게 따뜻하고 부드러워요. 첨부터 넘사벽인 줄 딱 알아봤어요." "완전 멋있어요. 할아부지. 어른이래도 뭐 어렵지도 않구요. 선생님하곤 달라요." "포스가, 화악 느껴져요 선생님은 없는."
서지우: "두번째 팔씨름이 시작됐다. 예상과 달리 선생님의 손 힘은 나와 백중지세를 이루었다.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 게임은 나의 완패였다. 선생님이 당신의 손아귀를 거두어간 다음에도 나는 한참이나 앉은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 나는 공포감을 느꼈다."

이적요와 서지우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결코 대칭적이지 않다. 신체적 나이를 제외하고, 이적요는 서지우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것으로 묘사되며, 그것은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이적요 본인, 변호사 오영훈, 제자 서지우, 그리고 은교를 통해 확인되고 또 재확인된다. 심지어 이적요는 은교와 '천박한 육체적 사랑'이 아닌 '진정한 플라토닉 러브'까지 나눈다 (작가는 이적요가 은교와 섹스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임을 직간접적으로 끊임 없이 강변한다!!). 이것이 바로 <은교>의 다인칭 시점이 기능하는 방식이자, <은교>를 노인 포르노 소설로 만드는 핵심 요소이다. <롤리타>의 험버트는 결말에 이르러 롤리타가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음을, 오히려 자신을 혐오했음을 깨닫는다. 그의 나르시시즘이 깨어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적요의 나르시시즘은 소설 마지막까지 결코 깨어지지 않는다. 즉, <롤리타>가 험버트의 나르시시즘을 냉소하는 소설이라면, <은교>는 이적요의 나르시시즘을 정당화하는 소설이다. 그리고 이런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술적 장치가 바로 두 소설이 선택한 서로 다른 '시점'이다.

'평론가'라는 직함을 단 이의 글은 아니지만, 저 글은 내가 수없이 목격해 온 한국 평론계의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면이 있다. 즉,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분석 없이 작품을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기호학과 같은 특정 이데올로기나 이론적 틀에 끼워 맞추는 문제. 실증주의를 강조하는 것보다 이 문제를 더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실증적 태도가 과학자뿐 아니라 지식을 생산하는 모든 이들에게 요구되는 필수 덕목인 이유다.



잡설 잡설

1.
얼마전 지인이 대화 중에 "현대인들의 가장 큰 착각은 자신들을 계몽된 근대인이라고 믿는 거야"라는 얘기를 했는데, 그 말이 요새 계속 생각나 곱씹게 된다. 어쩌면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바로 이 착각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근대적/합리적이라는 미몽에서 깨어날 필요가 있다.


2.
최근 새정부 내각 내정자들의 위장전입 문제가 이슈가 된 모양이다. 때마다 쑈하지 말고, 여야좌우할 것 없이 국민들 앞에 서서 다같이 손잡고 고해성사 한번 하고, 위장전입과 다운계약서 문제만큼은 검증 내용에서 빼는 게 좋을 거다. 거기서 자유로운 인간들이 거의 없을 거거든. 다 똑같은 주제에 정권 바뀔 때마다 번갈아 가며 서로에게 삿대질하는 쑈는 참 봐주기가 힘들다. 그리고 제발 남 욕하며 자기는 깨끗한 척하지 말자. 역겹다.


3.
가끔 들르는 유머 사이트에서 유시민이 비문으로 점철된 허지웅의 트윗을 디스하는 장면이 캡쳐된 걸 보았다. 유시민에게 디스당한 허지웅의 트윗:


이 알송달송한 비문을 보고 있자니, 석사 초년생 시절 세미나 수업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한 선배가 발제를 했는데, 당시 암호와 같은 불란서산 철학서적들에 빠져 있던 나는 알송달송한 문장들로 가득 찬 그 선배의 발제문이 참 심오해 보여, 사실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 이해도 못하면서, 속으로 감탄사만 연발하고 있었다. 발제가 끝나자 세미나를 진행했던 교수님이 한 10초간 침묵하시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이 발제문을 단 한 글자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글이 반드시 잘못 쓴 글은 아니겠으나, 너희가 그런 글을 쓸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다음 주에 다시 써와라." 내가 심오해 보이는 알송달송한 글들을 경계하기 시작한 건 바로 이 때부터 였다. 개소리를 개소리라고 명확히 짚어준 그 교수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저 허지웅의 트윗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아, 끔찍하다.


4.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부시와 보노

이 사진을 보니 이 노래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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