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의 백성 잡설

문재인 대통령이 방북 시 북한 주민들에게 90도로 인사를 한 것이 현지에서 화제가 됐다고 한다. 탈북자 김지영 씨에 따르면, "북한에서 대통령이라고 하면 우러러야 할 대상, 신처럼 모셔야 될 사람,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며, "문 대통령이 이번에 인사하는 걸 보면 북한 주민들이 너무 놀랄 일"이라고 한다. 뭐, 당연한 얘기다. 저 정도 신격화가 되어 있지 않으면 북한의 현 독재 체제가 유지될 수가 없다. 매체들과 인터뷰를 한 여러 탈북자들은 문 대통령의 폴더 인사가 수령 체제에 익숙한 북한 주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충격은 북한 주민만 받은 게 아닌 듯 싶다. 북한 주민들이 김정은 수령님을 어떻게 모시는지 여과 없이 지켜본 남한 주민들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문재인 대통령님을 얼마나 무례하게 대했는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반응은 즉각 표출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프레스센터에 들어서 국민들에게 폴더 인사를 하는 모습을 "무례하게도" 의자에 앉아 사진만 찍고 있는 기자들을 보며, 한 남한 주민은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자 다른 주민들도 이에 동조하기 시작한다.



문 통령의 백성이 된 이 남한 주민들을 보고 있으니, 현재 성폭행범으로 검찰 조사를 받고 계신 한 영화 감독님의 옛 발언이 떠올랐다.



남북한은 이렇게 하나가 되어 간다.






"예능인문학" 비판? 잡설

출판 전문 잡지인 <기획회의>에서 최근 "예능인문학" 비판 특집호를 냈다는 소식을 건너듣고, 반가운 마음에 (배보다 배꼽이 더 큼에도 불구하고) 온라인으로 책을 주문했는데, 3일만인 오늘 도착했다 (이런 잡지는 왜 전자책을 내지 않는지 모르겠다. 비용이 많이 드나?).


사실 이 책을 굳이 구매까지 한 이유는 강양구 씨의 유시민 비판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내가 강 씨의 글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과거 황우석 사태 때 그가 쓴 기사들은 마치 가뭄에 내리는 몇 방울의 빗줄기 같았기에, 그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신뢰가 아직 강하게 남아있다. 더해서, '지식 소매상'으로서의 유시민에 대해서는 나 역시 비판적이고, 언제 한 번 관련된 글을 써볼까 싶기도 했기 때문에, 강 씨의 이번 글은 읽기 전부터 무척 반가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큰 기대는 곧 큰 실망으로 돌아왔다. 그는 길지도 않은 지면의 상당부분을 유시민이라는 '유명인'을 비판해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토로하는 데 낭비해버렸고, 비판 역시 구체적이고 날카로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마지막 문단을 보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할 얘기가 한둘이 아니지만 지면 사정 때문에 여기서 멈춰야겠다. 한때 유시민의 팬이었던 사람으로서 간곡히 당부한다. 지식 소매상 역할을 제대로 할 생각이 없다면 그냥 예능 방송이나 열심히 하시라. 책 안 내도 먹고살 만하지 않나.

'지식 소매상'으로서의 유시민이 문제라면, 그 말은 그가 만들어 내는 콘텐츠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그 콘텐츠가 책이라는 매체를 타고 대중으로 흘러가든, 방송이라는 매체를 타고 대중으로 흘러가든 그게 문제를 야기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아니, 오히려 책보다 방송이 훨씬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 영향력은 훨씬 크면서 책임은 훨씬 작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은 쓰지말라면서 예능 방송이나 계속하라니, 이게 말인가 방구인가.

강양구 외에 섭외된 다른 필진들의 글도 대체로 기대 이하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장 심각한 것은 스스로 '인문학자'라 칭하고 있는 김경집 씨의 글이다. 그는 최진기를 비롯한 "예능인문학자"를 비판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상 그가 비판하는 대상은 "예능인문학"이 아닌 그 비판자들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선 최진기 등의 스타들에 대해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믿는다. ... 대중들에게 인문학의 즐거움을 선사한 그들의 노고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려는 치사한 짓은 경멸한다. ... 그들이 따먹은 열매에 대해서만 질시할 게 아니다. 최진기 등이 진화할 수 있는 한계가 엄연히 존재한다. 물론 자기 벽을 깨뜨리고 그들이 진화하는 건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할 수 없는 진화의 영역이 존재한다. 이제는 그 영역을 비판자들이 채워야 할 때다. 그게 없으면 모든 비판은 공허하다.

김 씨가 그간 출판한 책들을 보면, "예능인문학" 비판자들에게 그가 이런 일갈을 날리는 게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그는 이런 책들을 썼다. <인문학은 밥이다>, <엄마 인문학>, <김경집의 통찰력 강의>. 즉, 김 씨는 최진기 같은 스타에 의해 유지 확장되고 있는 "예능인문학" 생태계의 일원이다. 이런 이를 왜 "예능인문학" 비판 기획에 섭외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황교익을 비판한 노정태의 글 역시 고구마 몇 개 분량의 답답함을 선사한다. 황교익만큼 쉬운 상대가 있겠나 싶었지만, 노 씨에게는 별로 쉬운 상대가 아니었나보다. 혼밥하는 걸 "사회적 자폐"라고 비판하는 황 씨가 한국인의 "소셜 푸드"인 떡볶이를 비판하는 건 아이러니하다는 노 씨의 인신공격성 남의 다리 긁는 소리를 읽고 있자면, 헛웃음이 나온다.
[떡볶이는] 바로 우리 한국인의 '소셜 푸드'인 것이다. 떡볶이를 맛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황교익의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다들 모여 즐기는 떡볶이 타임에 인상을 쓰고 앉아 있는 사람이 다른 이에게 '사회적 자폐'를 운운하는 것은, 다소 아이러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이 특집호에서 건진 것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김겨울은 채사장의 <지대넓얕>이 가진 내용상의 오류 몇 가지를 구체적으로 짚고, 그러한 오류가 사소한 것이 아님을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위에서 지적한 점들이 시시콜콜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채사장의 저서가 얇다는 뜻이다. 학문의 깊이는 섬세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 책 뒤표지에는 앞서 말한 문구 위에 한 줄의 문구가 더 있다. "중요한 것은 전문 지식이 아니다." 전문 지식이 어떻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통을 위해 꼭 필요한 넓고 얕은 지식"은 전문 지식으로부터 나온다. 쉽고 넓은 지식만을 중요시하고 전문 지식을 폄하 할 때, 그 쉽고 넓은 지식의 기반 역시 붕괴할 것이다.

가장 인상 깊은 글은 출판평론가 김성신 씨의 글이다. 그는 출판과 미디어라는 두 개의 매체가 얼마나 다르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몇 가지 예를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주면서, 출판에 비해 미디어가 저질 인문학 콘텐츠에 훨씬 취약하다고 주장한다. "예능인문학" 시장과 관련해 출판과 미디어의 생리와 메커니즘을 좀 더 구체적으로 비교하는 작업은 유의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이번 <기획회의> 특집호는, 얻은 것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크게 실망스러웠다. "예능인문학"에 대한 비판은 "인문학"이라는 용어의 대중적 남용을 지적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현대 학문 체계에서 인문학이라는 분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 역사, 문학, 과학만이 존재할 뿐. 예능에 출몰하는 잡지식인들이 '인문학'이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데에는 자신을 모든 지식에 능통한 것처럼 포장하려는 의도 외에 전문가들의 비판을 피하고자 하는 속셈도 숨어있다. 유시민이나 최진기 같은 "예능인문학자"들은 TV나 책을 통해 역사, 경제, 정치에 관해 온갖 설을 풀지만, 스스로 역사가, 경제학자, 정치학자로 명명하지 못한다. 그렇게 하는 순간, 전문가들의 비판/검증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학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문학(자)' 따위의 용어를 쓰며, 전문가들의 눈을 피하는 것이다. '인문학적 지식" 운운하며 스스로 "인문학자"임을 자처하는 이들은 열이면 열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없는 잡(지식)놈으로 보면 된다.

니들이 역겨운 이유 잡설

황우석 사태가 터진 직후인 2006년 말경 서울대 민교협 소속 교수들은 서울대 내 연구윤리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데 합의하고 관련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관악모둠강좌 - 진리탐구와 학문윤리>라는 학부 과목을 개설했다. 이는 단지 이공계생을 위한 연구윤리 교육이 아닌, 전 전공분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학문과 관련한 전반적인 윤리교육에 가까웠다. 예컨대, 법대(현 법률전문대학원) 조국 교수는 표절에 관한 강의를, 수의대 우희종 교수는 황우석 사태 및 광우병 관련 문제를, 의대 김옥주 교수는 비윤리적인 인체실험의 역사를, 공대 이경우 교수는 공학윤리를, 생명과학부 이준호 교수는 실험실 윤리를 강의했다. 학내 여러 "스타" 교수들이 강사진에 포진해 있었기 때문에 정원이 200명 이상인 대형강의였음에도 수강 대기자가 늘 적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수업을 개설하는 데 주요 멤버로 참여했던 김진수 전 서울대 화학부 교수와 관련한 뉴스를 오늘 접했다.



요약하자면, 국가에서 연구비를 받아 수행한 연구의 특허를 자신이 설립한 회사인 "툴젠"으로 빼돌렸다는 의혹으로, 대표적인 연구윤리 위반 사례라 할 수 있다. 서울대와 검찰청 등에서 조사를 진행중이라고 하니, 곧 결과라 나오리라 기대한다. '진리탐구와 학문윤리'수업은 아직도 매학기 개설되고 있던데, 만약 김 전 교수에 관한 의혹이 사설로 드러난다면, 김 전 교수와 학문윤리 강의를 함께 만든 현 강사진은 동료의 연구윤리 위반 사례를 강의 커리큘럼에 포함시켜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이 그리 낯설지는 않다. '성장'보다는 '분배'에, '자유'보다는 '평등'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현 '진보진영'의 역사는 사실 아이러니의 역사다. 이미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들이 겪은 바 있는 계급고착화, 일명 '사다리 걷어차기'를 가속화하는 데 일조한 고시제 폐지나 수시제 확대 등의 주요 정책이 대부분 '진보' 정권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과거 조국의 개천용 발언이나, 최근 논란이 된 장하성의 강남 예외론 발언 등은 고착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계급의 사다리 위에서 그것을 걷어차고 싶어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드러낸다.

소설가 이청준은 <당신들의 천국>에서 운명을 함께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사랑은 위선일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반대로 말해, 진정한 사랑은 그 대상자의 운명에 동참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강남좌파들은 가난한 자들이 왜 자신들이 아닌 보수진영에 투표하는지를 늘 궁금해왔다. 그 답은 저들이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확인하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장하성의 이웃은 최저시급으로 생활해야 하는 가난한 서민이 아닌, 같은 아파트 주민 홍준표다.


세대론 잡설

지인으로부터 우연히 P공대 교수에 대한 가십을 들었다. 아산병원이 환자들의 숙면권 보장을 위해 병원 간호사들에게 수면양말을 신긴 문제를 두고 다른 트위터리안들과 논쟁(?)하다가 꼰대짓과 초딩스러운 인신 공격을 해서 빈축을 샀던 모양인데, 내게 인상적이었던 건 그의 진상짓 자체보다 '간호사'에 대한 그의 시대착오적 인식이었다. 50년대 중반생인 그의 발언은 그가 간호사를 의료과정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전문직이 아닌, 본인이나 환자에게 하대를 받아도 괜찮은 병원 시녀로 보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간호사에 대한 인식이 이러하니 그와 현직 간호사들의 대화가 평행을 달리다 안드로메다까지 간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 문제는 <세대론>으로도 확장 가능하다고 본다. 쉽게 말해, 5-60대가 보는 세상과 2-30대가 보는 세상은 같은 세상이 아니다. 물리적으로는 같은 공간에 살고 있는 듯 하지만, 세상에 대한 인식은 서로 공약불가능하다는 말이다. 현대사회에서 이런 세대 간 차이가 생기는 건 사실 자연스럽다. 100년이 지나도 사회의 형태와 구조가 크게 변하지 않았던 전근대 농경 사회에서는 세대 간 차이가 적었겠으나, 10년 아니 5년 단위로 사회의 구조가 확확 달라지는 현 21세기에는 세대간 차이가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현 사회를 더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건 대체로 한 살이라도 젊은 세대이지 늙은 세대가 아니다.

문제는 세상을 보는 눈이 가장 정확한 젊은 세대가 사회적으로 가장 적은 권력/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데서 발생한다. 자신에 반대하는 트위터리안들에게 반말과 막말을 서슴치 않는 P공대 교수의 태도는 10여 년전에 등장했던 "20대 개새끼론"을 연상시킨다. 이들이 사회적 권력과 지위를 상실하고 그저 죽을날을 기다리는 노망난 늙은이들이면 별 문제가 없겠으나, 안타깝게도 5-60대에 벌써 노망이 난 이 양반들은 여전히 한국 사회 거의 전 분야에 걸쳐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게 바로 한국 사회에서 <세대 간 계급> 문제가 발생하는 시작점이라고 본다.

사실 이 문제는 10년 전 쯤 <88만원 세대>가 출판됐을 때 본격적으로 논의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책 자체(+저자들)의 역량 부족에 더하여, <세대론>을 공격했던 당시 386 운동권들의 방해로 이 문제는 제대로된 사회적 논의의 장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뭍히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88만원 세대> 같은 허약한 제목의 책이 아닌 <386이 대한민국을 망친다> 같은 좀더 진취적인 제목의 책에 의해 <세대론> 문제가 다시 제기되기를 바란다.

오작두 감상


요새 내 삶의 활력을 주는 오작두
드라마 역사에 남을 수작도 아니고, 내러티브도 여기저기 삐걱거리는, 
전반적으로는 그저 나쁘지 않은 평작 수준의 드라마지만,
개인적으로는 여러 번 곱씹으면서 내 삶도 함께 반추하게 만드는 고마운 작품이다.

주인공인 한승주와 오작두 그리고 제3의 주인공 조봉식의 인생은 내 세대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다.
집에서나 사회에서나 이전 세대가 만든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그래서 두 곳 모두에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
그럼에도 순수성 대한 감성을 잃지는 않은,
내적으로는 불안하고, 외적으로는 불안정한 세대

이 드라마에 조용필의 <꿈>이 자주 등장하는 게 우연은 아닐 것이다.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인생을 이렇게 잘 묘사한 노래가 또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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