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그 사람은 그 사람이 맞는가? 잡설


안경환 교수가 법무부장관으로서 "폭력 사내"의 입장을 배려하는 정책을 펼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 정반대일 것이다. 모든 성폭력에 확고히 반대하는 정책을 펼칠 것이고, 인권주무기관으로서의 법무부의 위상을 확고히 할 것이다. 이건 그의 살아온 인생이 증명하고, 그의 지인들이 보장할 것이다. 나도 그점에 대해서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사석에서 몇 번 말씀 나눈 적도 있고, 특히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시 '모양새를 내려 모셔온' 정년퇴임 교수가 끝까지 시민들과 함께 싸우는 모습에 크게 감동한 바 있다. 걸어온 인생만큼 강한 입증은 없다고 생각한다.


링크한 홍성수 교수의 글은 논란이 된 안경환 법무부장관 지명자의 <남자란 무엇인가>에 대한 일종의 변호이다. 책에 대한 변호 자체는 크게 문제 삼을 게 없다. 홍 교수는 안 지명자의 책은 비록 친절하지는 않지만, 맥락상 남성의 성적 본성이나 성매매를 정당화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안 씨의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홍 교수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 더욱이, 글 말미에 홍 교수는 안 씨의 성 인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도 적절히 지적한다. 안 씨가 "생물학적 남성의 '본질'을 일종의 고정변수"로 보고 있고, 이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나와야 할 지적이지만, 나는 홍 교수 외에 이런 지적을 하는 이를 보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홍 교수의 글은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홍 교수의 글에서 정작 내 눈길을 끈 것은 위에 인용된 문단이다. 글의 중간쯤에 배치된 이 문단에서, 홍 교수는 안 교수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성폭력과 인권 문제에서 진일보를 이루게 할 적임자임을 강조한다. 안 지명자와 그의 삶을 지켜본 그의 지인들과 홍 교수 자신이 이를 보증한다는 것이다. 그는 안 씨가 "걸어온 인생"이 그것을 입증해준다고 거듭 확신한다. 내가 거슬리는 건 바로 홍 교수의 이 '확신'이다.

홍 교수의 확신은 그 자신이 안 지명자가 걸어온 인생을 잘 알고 있다는 판단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타인을 '안다'는 확신은 인간이 가장 쉽게 빠지는 함정 중 하나이다. 인간은 자신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은 타인에게 신뢰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관계를 맺는 순간 그는 '모르는 사람'에서 '어느 정도 아는 사람'로 재분류된다. 관계를 맺는 빈도가 높아지고, 그에 대한 제3자의 평가까지 접하게 되면 '어느 정도 안다'는 느낌은 쉽게 '확신'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이런 착각이야 말로 인간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함정이다. 자기 속도 모르는 게 인간인데, 타인은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은 바로 인간이 가진 이런 약점에 대한 일종의 경고다.

이런 경고를 무시하는 것은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다. 다소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대부분의 사이코패스들은 주변으로부터의 좋은 평판을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출 무기로 삼는다. 이를 위해 그들은 이웃들에게 늘 친절을 베푼다. 그 모습을 본 이웃들은 그가 좋은 사람임을 확신하고, 그에 대한 좋은 평판을 형성하는 데 일조한다. 즉,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이코패스의 보호막이자 그가 노리는 희생자를 잡을 덫으로 이용당하고 있는 셈이다. 

유사한 문제가 사회 곳곳에서 흔히 발견된다. 나 역시 지우고 싶은 경험이 있다. 군복무 시절 친하게 지냈던 후임이 있었다. 같은 중대에 속했으나 소속이 달라 내부반 생활을 같이 하지는 않았지만, 대화도 잘 통하고 인성도 좋아서 나는 그를 무척이나 아꼈다. 당시는 군대에 가혹행위가 존재할 때라 우리라도 내무반 문화를 좀 바꿔보자는 얘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내가 그의 실체를 알게 된 것은 제대를 불과 1주일 정도 남겨둔 시점이었다. 나는 그가 그의 후임들에게 얼마나 악질적인 고참인지를 나와 그리 친하지는 않았던 다른 후임으로부터 전해들었다. 일부러 기회를 노려 그의 가혹행위 장면을 직접 목격하기 전까지,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했다. 제대 전날이었던가, 나는 그 말을 내게 전한 그 후임에게 그 사실을 왜 이제야 말했냐고 물었다. 그는 나와 그가 너무 친해서 자기 말을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그의 실체를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웠고, 그래서 제대하기 전에 알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선임, 동기, 후임들에게 그에 대한 칭찬을 하고 다녔었는지를 깨닫고 나는 얼굴이 달아 올랐다. 나는 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가 나를 대하듯 남도 똑같이 대할 것이라고 믿었던가, 그런 회의가 밀려왔다. 내가 그를 칭찬할 때, 그에게 가혹행위를 당하던 후임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나의 무심하고 무지한 행동은 분명 그들의 고통을 가중시켰을 것이다. 그 후임에 대한 나의 믿음이 그가 가혹행위를 지속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 경솔함과 무지는 나 자신을 가해 옹호자로 만들었다. 그 때를 생각을 하면 지금도 얼굴이 달아 오른다.

안 지명자에게 절대적 신뢰를 보이는 홍 교수에게서 나는 군복무 시절의 나를 보았다. 그의 글로 미뤄보건대, 홍 교수는 안 지명자의 저서를 읽고, 그를 사석에서 몇 번 만났을 뿐 그와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안 지명자가 걸어온 인생을 이야기한다. 홍 교수는 안 씨가 1975년 그와 교제하던 여성의 도장을 위조해 허위로 혼인신고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불과 2년 전, 같은 학교 여학생을 기숙사로 불러들이고 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뜨려 퇴학당한 자신의 아들을 위해, 그가 탄원서를 작성해 퇴학을 아주 가벼운 징계로 바꾼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기에 아마도 몰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안 씨가 걸어온 인생이 입증하는 바 그가 성폭력과 인권 문제를 개선하는 데 적임자라고 확신했다. 홍 교수의 이런 발언은 안 씨에 의해 강제 혼인을 당했던 그 여성이나, 안 씨 아들에 의해 피해를 입었던 그 여학생의 피해 경험을 부정하는 것이다. 물론 홍 교수가 이런 상황을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안 씨를 '안다'고 여겼던 홍 교수의 경솔한 착각이 야기한 불가피한 결과다.

타인을 '안다'고 착각하고, 그에게 과도한 신뢰를 보이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가해자를 옹호하고, 피해자에게 2차 폭행을 가하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철저한 불가지론자가 되는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절대불변의 확실한 진리는 아니라는 분명한 자각, 자기가 알고 있는 영역과 모르는 영역을 명확히 구별하는 자세,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배치되는 정보를 접했을 때 그것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훈련을 통해서만 불가지론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친목질을 피하기 위한 훈련이기도 하다. 나는 회의하는 이성이 저열한 친목질을 압도하는 그런 사회를 꿈꾼다.





덧글

  • 2017/06/16 11:3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6/16 13:4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리버럴 2017/06/16 16:27 # 삭제 답글

    얼마전 조국이 민정수석 될 당시, 진중권이 방송에서 친구로서 쉴드치는 걸 보면서 제가 느꼈던 걸 아주 잘 설명해주셨네요. 민주주의 하겠다면 불가지론자가 되어야 마땅하지요. 그렇게 보면 경험주의를 배태한 영미권에서 민주주의 제도가 먼저 뿌리내리고 확산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인듯 합니다.
  • 가녀린 얼음요새 2017/06/16 22:12 #

    진중권과 조국의 브로맨스는 예전부터 참 아름다웠죠. 잘 어울리는 한쌍이라고 생각합니다.ㅎㅎ

    인간이란 게 강력한 자석에 이끌리듯 뭔가를 자꾸 믿으려는 성향이 있어서 불가지론자가 되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의심과 경계를 늘 거두지 말아아 햐는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 santalinus 2017/06/17 18:35 # 답글

    저도 그래서 사람을 쉽게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 가녀린 얼음요새 2017/06/18 00:14 #

    네, 제가 누군가에게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도 조심스럽지만, 누군가가 제게 신뢰를 보이는 것도 경계하게 되더라고요.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라는 생각이 들 때가 간혹 있습니다.ㅎㅎ
  • 리버럴 2017/06/19 00:58 # 삭제 답글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합리적 회의주의는 좋지만, 병리적 의심병(물론 이것은 진영병에 기초한 것이라, 광적인 믿음과 한 쌍을 이루는 것이기도 한데요)으로 인한 음모론 창궐도 경계해야 하겠지요. '합리적'이라는 부분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음모론'이 회의주의와는 전혀 별개의 것이겠지만, 어찌되었든 저신뢰사회라는 한국의 고질적 병폐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도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신뢰사회로 가기 위해선 투명성제고 등 여러 제도적 노력도 뒷받침되어야 하겠지만,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도 인간신뢰를 강조할 필요도 있을 것 같거든요.
  • 가녀린 얼음요새 2017/06/19 02:19 #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회적 신뢰를 구별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포스팅에서 강조하고자 한 건 사회적 신뢰와는 다소 별개인 '인간'에 대한 회의주의입니다. 예컨대, 중부대 고은태 교수는 엠네스티 한국지부장으로 인권과 소수자 문제에 있어 여러가지 유의미한 활동을 했습니다만, 실제 삶에서는 젊은 여성들을 성희롱하고 추행했던 것으로 밝혀졌죠. 그러니, 어떤 사람의 글이나 공식적인 활동이 긍정적으로 보인다고 해서, 그것을 그 사람 개인에 대한 평가로까지 확장하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그 두 개를 분리하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기울여야 겠죠. (사실 저도, 제 글을 보고 저 개인에 대한 상상으로까지 연결하는 분들을 보면 조금 불편해집니다. 저라는 개인은 제가 쓴 글들에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거든요.)

    사회적 신뢰는 이와는 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사회에 사회적 신뢰가 부족한 이유를 대충 두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첫째는, 언론과 전문가에 대한 신뢰 부족입니다. 이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한국 언론과 그 언론에 노출되는 자격미달 전문가들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언론과 전문가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회가 치뤄야 하는 사회적 비용은 너무나도 크죠. 예전 그와 관련된 포스팅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리버럴님이 개인적으로 아신다는 한윤형 씨와 관련된 포스팅이군요. - http://gehis.egloos.com/4083362 제가 이 포스팅에서 트랙백한 글도 매우 유용합니다.

    둘째는, 말씀하신 진영논리입니다. 정치적인 문제와 관련된 음모론은 보통 상대 진영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원론적으로 말해, 음모론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내로남불을 경계하는 태도만 장착해도 한국 정치 논쟁에 만연한 음모론은 상당부분 해결될 것이라고 봅니다.
  • 리버럴 2017/06/20 18:43 # 삭제 답글

    감사합니다. 제가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것을 아주 명징하게 설명해주셨군요. 소개해주신 포스팅은 제가 미쳐 못 읽었던 것인데, 정말 명비평이네요. 세 번 읽었습니다. 이래서 얼음님 블로그 폐쇄는 사회적 손실인 겁니다.ㅎㅎ

    포스팅 내용대로 팩트에 대한 존중 없이는 어떤 이론과 이데올로기도 허상일 뿐이죠. 제가 작가 김훈을 저널리스트로서 최고라고 생각한 것도 ‘사실’에 대한 그의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에 기초한 것인지,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채 내 욕망을 지껄이고 있는 문장인지 구분하라”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하지 말라.”
    “언론인들은 근본적으로 신념의 언어가 아닌 과학의 언어로 사유해야 한다”
    “사실에 바탕해서 의견을 만들고, 의견에 바탕해서 신념을 만들고, 신념에 바탕해서 정의를 만들고, 정의에 바탕해서 지향점을 만들어야한다”

    한국의 너절리즘 풍토에서 김훈의 이런 말은 울림이 컸습니다.

    그나저나 아마 한윤형도 오래전부터 이택광에 대해 별 언급이 없는걸 보니 아마 예전에 이택광 실드친 일은 본인의 흑역사로 기억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ㅎㅎ

    한국 사회에 사회적 신뢰가 부족한 이유로 두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더하고 뺄 것도 없이 정확한 진단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개가 서로 공명하며 불신사회를 열심히 주조하고 있죠. 참 암울합니다.

    그런데 이와 별론으로 인간 신뢰와 관련해서는 여러 측면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인간됨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지론의 영역임이 분명하지만 인간사에서 사람에 대한 판단은 끊임없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고 보면(인사, 차입, 결혼, 교제 등등) 인간됨에 대한 평가를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가하는 그런 방법론적 측면에서 접근해 들어가야 되지 않을까요.

    인사에 국한해서 본다면 개인의 능력만이 아니라, 인간성 등의 평판도 중요하게 고려하는 요소라고 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더라도 한 개인이 보는 시각은 일면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래서 평판조회(크로스 체크)가 어느 정도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주요 인사와 관련해서는 말이죠.

    아마 얼음님이 말씀하신 군에서의 경험한 후임에 대한 평가도 평판조회가 작동했다면 어느 정도는 드러났을 일이 아니었을까요. 만약 기업이나 기관 인사 관련이 되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요.

    그런 점에서 홍성수 교수의 안경환 교수에 대한 평가는 불가지론 이전에 다른 각도에서도 비판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명박의 ‘내가 해봐서 아는데...’의 인물 버전이라는 것이죠. 말하자면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그 사람 괜찮아. 내가 보증한다니까...’ 대충 이런 뉘앙스를 느꼈습니다. 뭐 사인 간의 거래나 채용 등에 국한된 얘기라면 충분히 그럴수도 있겠는데, 행정부처를 총괄하는 장관 인사 문제를 자신의 한정된 경험과 느낌으로 입증시킬 수 있다는 오만한 모습... 이런 지점에서도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 가녀린 얼음요새 2017/06/20 22:58 #

    홍 교수의 문제가 자기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하는 데 있다는 리버럴님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제가 애초에 이 포스팅을 하게 된 것도 바로 그 점이 걸려서 였던 거죠. 홍 교수 앞에서의 안경환은, 혼인증명서 위조 피해를 당한 여성이나 안경환 아들과의 문제로 전학을 가야 했던 그 여학생 앞에서의 안경환과 분명 다른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홍 교수는 내가 겪은 안경환만이 진짜 안경환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듯 보이죠. 이 점에서 이명박보다 홍 교수가 더 메스껍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그가 "인권 연구가"를 자차하는 인물이기 때문일 겁니다. 결국, 홍 교수 같은 이들이 지켜주고자 하는 인권은 '선택받은 자들'의 인권인 셈이죠. 자기 눈이 자기 몸뚱아리가 아닌 하늘에 달렸다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소설가로서의 김훈만 접해본 터라, 기자로서의 김훈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 인용하신 김훈의 말들이 어디선가 들어본 것인 듯 해서 잠시 기억을 떠올려 보니, 오래 전에 읽었던 김훈 역사소설에 대한 비평에서 본 것이었네요. 김훈 소설들을 읽어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읽어볼 만한 글이라 링크해드립니다. (김훈과 그의 역사소설에 대한 신랄한 비판입니다 ㅎㅎ)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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